소방차·구급차와 충돌사고, 내 과실이 그렇게 높을 수 없는 이유

신호를 지키며 정상적으로 직진하다가 교차로에 갑자기 진입한 구급차와 충돌했을 때, 보험사에서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상대방이 긴급자동차라 신호위반 특례가 적용됩니다. 고객님 과실이 60~70%입니다.”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합니다. 내가 신호를 지켰는데, 상대방이 구급차라는 이유만으로 내 과실이 더 높아진다는 게 납득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긴급자동차 특례는 무조건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모르면, 보험사가 제시한 과실비율이 그대로 합의 결과로 이어집니다.
긴급자동차 특례란 무엇인가
도로교통법은 소방차, 구급차, 경찰차 등 긴급자동차가 그 본래의 긴급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을 때, 신호위반이나 중앙선 침범 등 일부 교통 법규를 위반해도 처벌받지 않도록 특례를 두고 있습니다(도로교통법 제29조, 제30조).
이 특례 때문에 구급차가 적색신호에 교차로를 통과하다 사고가 났을 때, 단순 신호위반 차량과는 다른 기준으로 과실이 계산됩니다. 그런데 이 특례에는 두 가지 핵심 조건이 있습니다. 두 조건 중 하나라도 충족하지 못하면 특례 자체가 적용되지 않고, 과실비율은 완전히 다른 결과로 이어집니다.
조건 1 — 사이렌이나 경광등, 둘 중 하나만 작동해도 됩니다
흔히 사이렌도 켜고, 경광등도 켜야만 긴급자동차로 인정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3조 제1항 제2호에 따르면, 사이렌을 울리거나 경광등을 켜는 경우 — 즉 둘 중 하나만 작동하는 경우에도 — 긴급자동차로서의 특례가 적용됩니다.
소방차가 사이렌을 작동하지 않았다는 원고 주장에 대해, 법원은 충돌 직전 영상에서 사이렌 소리가 미세하게 들리고 경찰 교통사고사실확인원에도 경광등·사이렌 작동이 기재되어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나아가 두 가지를 모두 작동해야만 특례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명확히 하였습니다. 원고 항소는 기각되었습니다.

사이렌을 안 켰다는 주장만으로 특례를 피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블랙박스 영상과 경찰의 조사 결과를 꼼꼼히 대조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건 2 — 탑승 환자가 응급환자여야 합니다
실무에서 결과를 가장 크게 바꾸는 지점이 바로 여기입니다.
구급차는 119 구급차든 사설구급차든, 탑승한 환자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2조 제6호에서 정의하는 응급환자에 해당해야만 긴급자동차로서의 특례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차량의 외형이 구급차라는 사실만으로 특례가 자동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4. 8. 20. 선고 2023나52002 판결
119 구급차가 적색신호에 직진하다 녹색신호 직진 차량과 충돌한 사안입니다. 법원은 탑승 환자의 생체징후(혈압 140/100mmHg, 맥박 75회/분, 산소포화도 100%)만으로는 응급환자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긴급자동차 특례를 부정하였습니다. 그 결과 과실비율은 구급차 80% : 상대 차량 20%로 결론났습니다.

119 구급차가 적색신호에 직진하다 녹색신호 직진 차량과 충돌한 또 다른 사안입니다. 탑승 환자는 머리에 둔상을 입은 2세 유아였고, 맥박 124회/분, 산소포화도 100%였습니다. 법원은 역시 응급환자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아 특례를 부정하였습니다.
이 사건에서 과실비율분쟁심의위원회는 상대 차량(원고) 60% : 구급차 40%로 결정하였으나, 법원은 구급차 70% : 상대 차량 30%로 다르게 판단하였습니다. 위원회 결정대로라면 상대 차량 보험사가 60%를 부담해야 했지만, 법원 판결로는 30%만 부담하게 되었습니다.
위원회 결정과 법원 판단 사이에 30%p 차이가 났습니다. 부상의 정도와 치료비·휴업손해 규모에 따라 이 수치 차이가 실제 보상금에서 만드는 금액 차이는 수백만 원에서 그 이상까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긴급자동차라도 주의의무는 면제되지 않습니다
긴급자동차 특례가 인정되더라도, 구급차나 소방차 운전자가 모든 주의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도로교통법 제29조 제3항은 긴급자동차도 교통안전에 특히 주의하면서 통행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합니다. 제2항은 긴급하고 부득이한 경우 정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할 뿐, 도로교통법이 정하는 일체의 의무규정 적용을 배제하는 취지가 아닙니다.

특수구급차가 식도암·흡인성 폐렴 환자를 이송하던 중 적색신호에 직진하여 충돌한 사안입니다. 법원은 긴급자동차 특례를 인정하면서도, 구급차가 도로교통법 제29조 제3항에 따른 교통안전 주의의무를 다소 소홀히 한 과실이 있다고 보아 상대 차량 60% : 구급차 40%의 과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긴급자동차의 특례는 신호위반 등 일부 규정의 면제이지, 사고발생책임 전부의 면제가 아닙니다. 감속여부, 전방주시의무 이행여부, 진로확보 노력여부는 과실비율에 여전히 영향을 미칩니다.
합의 전에 확인해야 할 3가지

구급차 또는 소방차와 충돌사고가 발생하고 보험사가 과실비율을 제시한 상황이라면, 합의 전에 아래 세 가지를 먼저 확인하는 것이 결과에 영향을 줍니다
자기 상황 확인 체크리스트
- 탑승환자가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상 응급환자 기준에 해당하는지 — 구급차의 이송기록, 병원 인계기록 등을 확인해야 합니다. 이 기록은 일반인이 직접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 경광등·사이렌 작동여부를 블랙박스 영상과 경찰 교통사고사실확인원으로 교차 확인했는지 — 두 자료의 기재가 일치하는지, 사이렌 작동여부가 영상으로 실제 확인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 긴급자동차 운전자의 감속여부 및 전방주시 의무 이행 여부가 반영되었는지 — 특례가 인정되더라도 구급차 측 과실이 0%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차로 진입 속도와 주의 정도가 과실비율에 반영되어야 합니다.
보험사가 제시한 과실비율이 위 세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상태에서 산정된 것이라면, 그 수치가 최종기준이 되지는 않습니다.
기록을 어디서부터 확인하고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